따뜻한 이야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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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경 기자
  • 승인 2008.10.16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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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지금 읽어라] ‘감기’

고통과 절망의 현실을 버텨내는 모래알 같은 삶들을 나지막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호출해주는 작품을 선보여온 윤성희의 세번째 소설집 ‘감기’.

2007년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하다 만 말’, 2006년 황순원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 최종심까지 오른 ‘재채기’, ‘무릎’ 등 최근 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얼핏 무질서하게 엮이는 이야기들 속에서 흐뭇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그의 소설은 진부하고 시시할 법한 인물과 사건도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거짓말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비극적이고 어두운 일상에 대한 이야기도 한마디 농담처럼 툭 던지고 만다.

상처와 균열에 무심한 듯 내보이는 연대의식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농담을 가장한 고독한 진실의 세계

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에는 대단한 사건이나 줄거리 대신 왁자한 주인공들의 사연과 주고받는 농담 같은 진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무릎’의 주인공은 세상에서 쓸모없는 물건만 모아놓은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자기 대신 죽은 사내의 가족을 찾아 무전여행을 떠나고, 무전 여행길에 어느 집의 정원사가 되지만, 그가 할일은 정원에 아무것도 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윤성희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엉뚱한 ‘농담’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농담인 양 말해서, 정말 농담처럼 보이지만 실은 절실한 진실이다. 그런 말들의 연쇄 속에서 작가는 삶의 진실을 수수께끼처럼 암호처럼 보여준다.

‘구멍’의 아버지는 매주 사는 로또복권을 인생에서 만난 행운의 숫자로 채워 넣는다. 아버지는 부산 출장길의 기차 속에서 만난 여인에게 짧은 연정을 품었고 그때 그 여인의 좌석번호도 그 행운의 숫자 중 하나라고 고백한다. 그러자, 정지화면처럼 멈춘 이 장면에서도 독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이질적인 감정이 별 충돌도 모순도 없이 뒤섞여 있는 순간들이 그의 소설에는 자주 등장한다.

2007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하다 만 말’에는 얼핏 한심해 보이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가진 돈을 긁어모아 창업을 궁리하는 가족은 전국의 맛집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젊은 시절에는 손자의 사주를 보러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떠돌았지만 이제는 부잣집 할머니랑 결혼해 한방에 인생을 역전해보겠다고 하는 할아버지, 가게세나 받아먹으며 살 팔자라더니 안 해 본 사업 없이 이것저것 하다가 결국 아파트마저 날리는 아버지, 폐암으로 선고를 받은 외할머니 앞에서 조선 중기부터 내려오던 반닫이를 불지른 후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엄마, 그리고 사년 내 고시 준비로 허송세월하는 오빠가 등장한다. 그들이 맛집을 찾아가는 여행도 코믹한 상황의 연속이다.

‘세계 모텔’ 앞에서 중국 방에 묵을지 인도 방에 묵을지를 놓고 다투고, 맛집을 돌다 배가 부른 나머지 탁구장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가족을 따라다니는 ‘나’는 사실 유령이다.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에조차 가족들은 우스꽝스럽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코믹하고 엉뚱하기만 한 가족은 아버지가 날린 아파트를 비우고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음에도 한순간도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희극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은 “대책 없이 유쾌한 소동극인가 하면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비극이기도 하다. 기쁨은 고통과 함께하고, 절망은 희망을 곁에 둔다. 기쁨은 고통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기쁨은 고통이고 절망은 희망이다. 그리하여 불행은 행복과 동의어가 된다”고 해석한다.

엉뚱하고 쓸쓸한 마이너리티의 풍경

만물수리상을 하며 뭐든지 고칠 줄 아는 ‘감기’의 아버지도 떠난 아내의 마음이나, 아들의 몽유병은 고치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는 엉뚱하지만 결국 쓸쓸한 마이너리티일 뿐이고 고만고만하게 비참한 인간들이 감정을 철저히 절약한 채 서로 연대할 뿐이다.

이 작품에는 온통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망가지고 상처 입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마을버스 운전사인 ‘남자’와 고속도로 톨게이트 매표원인 ‘여자’의 우연한 만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자에게는 마디가 잘린 검지가 있고, 여자에게는 화상으로 피부가 일그러진 손등이 있다. 뭐든지 고칠 수 있는 만물수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크던 어린 시절 남자에게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나고, 두 ‘아버지’들은 남자가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우긴다. 성인이 된 남자의 꿈에 등장한 아버지는 남자의 몸에 박힌 나사를 풀어내고,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이 들면서 남자는 감기 기운을 느낀다.

‘안녕! 물고기자리’에서는 할인매장에서 우연히 만나 찾아간 고등학교 동창과 그의 집에서 만난 네 사람이 모여서 놀이공원에 간다. ‘재채기’에서는 ‘고백의 날’을 없애자는 다섯 남자들이 그날을 만든 사람을 찾아 떠난다. ‘부분들’에서는 붕괴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기적의 사나이들’이 등장한다. 떼거리로 등장해서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며 각자의 사연을 털어놓고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지만 결말에 가서는 결국 고립되고 고독한 개인으로 돌아간다. 서로의 사연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개연성 없어 보이는 인연으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윤성희 소설은 특별한 문체적인 수사가 없는 단문들의 연쇄로,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합종연횡하며 희극과 비극의 순간과 감정을 뒤섞는다.

“짧고 빠르게 진행하는 문장의 속도감, 한두 개의 문장만 모여도 제 모습을 갖추고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유머의 따뜻함”은 이 소설의 특징이다.

70년대 태생 작가 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한 작품 활동을 해온 윤성희는 톡톡 튀는 감각적인 감성 없이도, 현란한 묘사 없이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완성해가는 과정에 있다. 진한 감동이나 교훈보다 단순히 책 읽는 즐거움만을 원하는 독자라도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이 소설은 한국소설의 젊은 활력이자 생기임에 틀림없다.

지은이 윤성희 
출판사 창비 
쪽수 273쪽 
가격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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