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
‘변치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
  • 신선경 기자
  • 승인 2008.09.11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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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재발견] '행복'

누구든 해 보았거나, 하고 있거나 혹은 하고 싶어 하는 보편적 테마인 ‘연애’. 공감할 만한 구석이 그 어떤 장르보다 많으면서도 정작 진부해지기 쉬운 멜로 영화에서 특유의 연출력으로 관객의 가슴 한 구석을 건드려 온 허진호 감독과 배우 황정민과 임수정. 두 배우의 만남으로 영화 ‘행복’은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스크린에 넘쳐 나는 각종 버전의 사랑 이야기는 요약하면 대개 둘 중 하나다. 남녀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행복하게 맺어지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에 처한 남녀가 애절한 사랑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사랑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멜로 영화의 정석이다. 하지만 현실 속 사랑이 어디 그렇던가. 영원할 것만 같던 뜨거운 감정도 결국은 한때요, 피치 못할 사정은 커녕 십중팔구는 스스로 변질되고, 이별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시작할 땐 우리들을 한 없이 행복하게 만들다가도, 이별 앞에선 후회와 상처와 미움으로 지독하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사랑이다. 너도 나도 공감하며 부른다는 유행가의 단골 레퍼토리도 사랑의 기쁨만큼 많은 게 사랑의 상처다.

영화 ‘행복’은 바로 이런 양면성을 가진 우리네 사랑 이야기다. 몸이 아픈 남녀, 가슴 아픈 이별... 설정만 보면 눈물 꽤나 쏟게 하려는 신파의 전형으로 보이지만, 이 상투적인 신파 공식도 ‘행복’에선 사랑의 이중적인 속성을 역설할 뿐이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생기 있게 연애하는 모습을 통해 한편으론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달콤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병 때문에 애절하긴 커녕 병 때문에 더욱 잔인해 보이는 이별 모습을 통해 한편으론 사랑이 얼마나 씁쓸하고 현실적인 것인지 뒤집어 보여준다. 이처럼 ‘행복’은 사랑의 낭만만을 변주하는 동화 같은 로맨스가 아니라, 한번쯤 연애를 해본 성인이라면 누구나 딱 “내 얘기!”라며 웃고 울며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로맨스다. 연애의 쓴맛 단맛을 모두 버무린, ‘진짜 사랑을 아는 성인들의 로맨스’다.

사랑의 낭만과 현실 섬세하게 풀어내다

허진호 감독의 4번째 사랑이야기 ‘행복’은 그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처럼 사랑의 낭만과 현실을 섬세한 통찰력으로 풀어낸 영화다. 그런데 그의 화법이 조금 달라졌다.

‘행복’의 연애화법은 절제된 영상언어가 특징인 그의 전작들에 비해 더 풍성하고 직설적이다. 제대로 된 고백 한 번 못해보고 마음속으로만 사랑을 키워가던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연인들은 ‘행복’에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함께 밤을 보내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남녀가 됐다. ‘행복’의 연인들은 “내가 그렇게 좋아?”, “너 없으면 이제 못살 것 같아”와 같은 닭살 돋는 대화를 나눌뿐더러, 여자는 남자에게 “우리 같이 살래요?”라고 대담하게 프로포즈 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꽃을 바치며 그야말로 영화처럼 사랑을 고백한다.

한치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아픈 몸이지만 그렇게 마음껏 연애를 즐기는 두 남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낭만적이다.

반면 ‘행복’은 사랑의 씁쓸한 실재를 담은 ‘봄날은 간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소심한 원망은 “개새끼, 니가 사람이니?”라는 격앙된 욕설이 되고, 민망하게 읊조리던 “변하는 거야….”란 대꾸는 “니가 좀 떠나줘”라는 잔인하고 솔직한 요청으로 변했다. 두 주인공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과 이별의 언어들은 마침내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 같이 생생하다.

이처럼 여전히 섬세하고 더욱 풍성해진 ‘행복’의 연애화법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처럼 또 다시 대한민국 멜로 영화의 새로운 교본이 됐다.

황정민·임수정·허진호, 행복한 만남!

연기력과 흥행력을 겸비한 스타배우 황정민과 임수정, 그리고 대한민국 대표 멜로 감독 허진호. 이들 세 사람이 모인 영화 ‘행복’은 2007년 충무로에서 가장 행복한 만남으로 불린 화제작이다.

‘행복’으로 2년 만에 멜로로 복귀한 황정민은 ‘너는 내 운명’의 뚝심 있는 순정남 ‘석중’과는 180도 다른, 사랑이 쉽게 흔들리는 나쁜 남자 ‘영수’로 변신해 한층 시선을 끌었다. 20대 스타 여배우로는 드물게 ‘연기파’ 타이틀을 달고 차별화된 행보를 걷고 있는 임수정은 본격적인 성인 연기를 선보인 ‘행복’을 통해 기존의 여린 소녀 이미지를 벗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사랑이란 화두를 섬세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풀어온 허진호 감독 역시 ‘행복’에서는 감정의 진폭이 큰 화법으로 관객들을 주인공들과 함께 웃고 울게 만들었다. 황정민의 색다른 변신, 임수정의 농익은 매력,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어우러진 영화 ‘행복’은 멜로의 계절 가을 ‘너는 내 운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어 또 한편의 웰메이드 흥행멜로를 탄생시켰다.

사랑을 아는 성인들의 로맨스!

서울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겨온 영수(황정민). 운영하던 가게는 망하고 애인 수연(공효진)과도 헤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간경변까지 앓게 된 영수는 주변에 유학 간단 거짓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시골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내려간다.

8년째 요양원 ‘희망의 집’에서 살며 스텝으로 일하고 있는 은희(임수정). 숨이 차면 죽을 수도 있는 중증 폐질환 환자지만 은희는 밝고 낙천적이다. 자신의 병에 개의치 않고 연애에도 적극적인 은희는 첫날부터 자꾸만 신경 쓰이던 영수에게 먼저 다가간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땐 헤어지죠, 뭐”

지루한 시골 요양원, 미래 따윈 보이지 않는 비참한 상황에서 영수 역시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없어 보이는 은희에게 의지하게 되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밤을 함께 보내면서 보통의 커플들처럼 그렇게 행복한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요양원을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1년 뒤. 은희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은 영수는, 마냥 행복한 은희와는 달리 둘만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진다. 궁상맞은 시골 생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은희도 부담스러워진 영수 앞에 때마침 서울에서 수연이 찾아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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