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8.08.14 1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과인] 한국동서발전(주) 하준호 차장

소리의 본질은 자유다. 그래서 갈마바람 부는 날 대지의 끝에는 바람소리가 난다. 하늘이 열리고 물길이 닿으며 내는 음원, 그것은 소통이고 흐름이다. 단절됐던 영육의 마디인 듯  키를 넣으면 아름다운 색소폰 영혼의 울림이 그와 나를 이어준다. 

원래 소리의 본질은 자유라서 폐쇄를 거부한다. 그래서 한 남자는 저 넓은 초원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갈마바람이 부는 날 대지의 끝에는 말없이 노을빛을 받으며 한 사람이 서 있고 이어 대지의 진혼을 부르는 듯한 소리 들린다.
 
하늘과 물이 속삭이는 대화를 음원으로 담고 있는 그 소리는 한 남자가 느끼는 따사로운 성감(聖感)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씩 자리에 앉게 하고 온순해진 사람들보다 더욱 온순한 음악으로 평원에 퍼져나간다.

그것은 소통이고 흐름이다. 교류하지 못하는 물이 썩듯 아낌없이 나눌 수 없는 예술은 ‘독방의 곡소리’와 같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한국동서발전(주) 하준호 경영혁신실 차장은 색소폰을 통해 일에 치여 일과 관계된 사람들 외에는 단절됐던 영육을 그들과 소통하려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취미이자 특기는 색소폰 연주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과 나눔의 시간도 갖기 위해 모인 ‘소리사랑회’를 통해 정기적인 연습과 공연도 하고 있는데 아무리 좋아서 하는 활동이라도 바쁜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충실하기가 쉽지 않다.

“악기를 연주하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소리를 통해 서로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배우고 하나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하모니를 위해 파트너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웁니다. 이러한 열정과 기쁨이 있는 색소폰 연주에 내가 푹 빠진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연주활동은 한명 한명의 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하므로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가 속한 연주단 단원들은 공연이 있을 때면 한 달 남짓 연습해야 하는데 모두들 저녁 시간을 쪼개 연습을 한다.

하지만 그의 하루 일과는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1999년 환경공학 석사에 이어 2004년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이 회사 경영혁신팀에서 6 Sigma 경영혁신의 MBB(Master Black Belt)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MBB는 6 Sigma의 교육과 과제지도가 가능한 최고수준의 능력을 갖춘 6 Sigma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자격이다.

그의 주요업무는 현장 현안 문제점 파악, 과제도출 및 해결방안 제시, 회사 고유의 6 Sigma 모델 개발, 신기법 도입 및 교재 개발, 과제지도 및 사후관리 , 6 Sigma 혁신요원 교육 그리고 6 Sigma 전략수립 등이다. 
 
6 Sigma란 1986년 모토로라의 빌 스미스에 의해 최초로 고안된 것으로 전통적인 품질관리 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제조업 분야의 품질향상 도구로 활용됐으나 그 후 연구개발 및 서비스 분야를 넘어 현재는 경영전략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제품 혹은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불량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체계적인 품질개선을 위해 문제 정의, 현재수준 정량화, 평가 및 개선을 시행하고 이를 유지, 관리하는 실무적 방법론이다.

2000년대에는 기업 내 혁신을 위한 방법론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회사 모든 부서의 업무에 적용이 가능하며 각자의 상황에 맞는 고유한 방법론을 개발·적용해 정량적 기법과 통계학적 기법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동서발전의 6 Sigma는 2003년 9월 6 Sigma 기본계획 수립, 2004년 5월 기본방침 확정됐고 작년까지 6차에 걸친 과제추진으로 정착기에 도달했으며, 현재 7차 무브 과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타 회사와 구별되는 이 회사만의 성과인 독자추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 과제관리시스템을 개발해 6 Sigma를 경영체제로 정착시켰다.

그가 맡고 있는 MBB는 이러한 6 Sigma 혁신업무를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본사 및 일산복합화력발전소의 과제 20여건을 지도하고 있으며, 올해 50명 이상의 과제리더 및 재무성과평가자(FEA) 등 혁신전문 인력 양성을 목표로 직원들에 대한 6 Sigma 교육을 직접 수행하고 있다.

‘공기업인’ 자부심이 성취의 큰 동력

그가 한전에 입사하게 된 동기는 1986년 9월께 당시도 취업이 지금처럼 어려운 시절, 우연히 학교 강당에서 대기업들의 취업 안내 설명회를 듣게 됐는데 그 중 한전의 안내 설명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취업 후에도 개인의 의지에 따라 유학을 포함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으며 공익성을 추구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공기업이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각인됐고, 그로서 그는 한전에 입사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원래 졸업하던 그해 한전 공채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면접 보는 날 집안에 우환이 있어 불참하게 됐고 그해 그는 입사를 하지 못했다.

그 후 한국유리공업(주)에 입사해 근무를 하면서도 한전은 그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1987년 한전 공채시험 공고를 보고 다시 응시해 1988년 1월, 그토록 원하던 한전에 입사하게 됐다.

처음 삼천포화력 화학부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그는 냉각수 처리설비 운영업무와 화공약품 검수, 화학기술원 및 전력연구원 연구기획실에서 근무하며 실무를 익혔다.

또 연구과제 관리, 국제협력 업무, 기술정보 관리업무 등을 수행하며 1990년 전력연구원장상 수상, 1992년 한전 주최 PC 경진대회 1등 수상과 같은 해 11월에는 국무총리상 수상(국가 Software 경진대회 수상) 12월 한전 사장상 1등급 수상을 하기도 했다.

'97년부터 줄곧 동해화력 환경화학부에서 근무하며 폐수처리설비 등 환경화학 관련설비 건설과 순환유동층보일러 시운전 업무, 환경 및 화학관련 설비 운영 및 환경관련 대관업무 등을 해 오며 공학석사 학위를 받은 해에는 동해시 신지식인에 선정됐고 동해시 평생 장학회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2001년에 환경부장관상 수상(환경보전 유공) ‘02년에는 전국 품질경진대회 대통령상(은상) 수상과 전사 경영혁신대회 최우수상 수상, 한전계열사 경영혁신대회 장려상 수상, ‘03년 전국품질경진대회 대통령상(동상) 수상 등으로 회사에 기여하며 실력도 쌓아갔다.

2004년 공학박사 학위 취득(호서대) 후에는 삼척대에서 2년간 겸임교수를 하기도 했다. ‘2005 국가 환경친화경영대상’ 발표에서 산자부장관상 단체상을 수상하면서 6 시그마 2차, 3차를 마쳤으며 6시그마 과제 사내 최종발표 대회에서 1위의 영예를 안았다.

그 뒤로 MBB 교육 및 수료 후 2006년과 2007년 연속해서 전국 품질분임조 경진대회 대통령 동상 수상, 2007년 사장상 1등급 수상 및 동서인상 수상 등 지금까지 그가 노력한 성과에 걸맞은 많은 상을 수상했다.

업무와 학업의 어려움 주마등처럼 스쳐

“그동안의 근무 중 기억에 남는 곳을 말한다면 삼천포화력, 전력연구원, 미국 연수생활 등 지나간 모든 근무지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고 소중한 추억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근무지를 꼽는다면 동해화력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1997년 3월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동해화력발전처에 전입한 이래 그는 환경과장, 화학과장과 6시그마 MBB 수행요원으로 근무하면서 나름대로의 사명감으로 전력설비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세계 최대·최초의 국내무연탄 순환유동층 발전소 시운전 당시 실질적으로 설계사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이 거의 포기했지만 ‘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6개월 이상 처장님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결국 성공적으로 시운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그에게 회사의 저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슴 속에 더욱 더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동해화력은 그에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곳이다. MBC 9시 뉴스 등 각종 언론보도, 논문발표, 강원대 겸임교수 활동, 환경청 위촉 환경도우미 및 해양경찰서 위촉 해양환경오염감시원 활동 등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받았고 공학박사 학위도 취득할 수 있었다.

또 환경단체인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총재상 수상, 동해시 제1기 신지식인 및 한국 신지식인 선정, 각종 연구논문 발표 및 창안상 1등급 수상, 환경부장관상 수상, 품질분임조 경진대회 대통령상 4회 수상은 물론, 1년에 한번 수상하는 ‘자랑스런 동서인 상’ 수상의 영예를 갖도록 해준 곳이기도 하다.

“단지 이러한 업무적인 일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선배님들과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 형님, 동생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을 나눌 수 있었고 강의를 나가던 대학의 젊은 학생들과 함께 했던 많은 시간과 대화들은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사실 그가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난관에 부딪혀 해결이 어려울 때나 진급에 탈락됐을 때의 실망감과 어려움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가장 어려웠을 때는 근무를 하면서 박사학위 공부를 할 때였다.

교수들의 배려로 그는 주로 주말 수업을 받았는데 금요일과 일요일의 밤잠은 동해에서 서울캠퍼스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해결하고 토요일은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건강하던 그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반신마비와 치매까지 겹친 상태여서 수술 후 약 2년 동안 병원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 후 그는 병원과 수업 때문에 서울과 동해를 오가면서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공부를 중단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계속했어요. 지금은 다행히 어머니이 정신도 돌아오시고 조금씩 거동도 하시지만, 내 일생에 있어서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그때였어요.”
하지만 그동안 근무해오며 에피소드도 많았다. 동해화력에 근무할 때 석탄연소 후 발생되는 석탄재는 비회와 저회로 구분되는데 당시 비회는 시멘트 부 원료로 재활용됐으나 저회는 재활용되지 않고 회처리장에 매립하고 있었다.

그 문제로 고민하던 중 인근 시멘트 제조업체와 시험을 실시한 결과 ‘시멘트 부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 저회도 재활용을 실시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돼 MBC 방송국 9시 뉴스에 소개되자 수십 년간 연락이 끊긴 친구들의 전화를 걸어와 다시 한 번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근무를 하면서 느낀 가장 큰 보람은 ‘회사가 어려울 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동해화력의 순환유동층 보일러의 운영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데 보탬이 될 수 있었다는데 큰 보람을 느꼈다고 그는 술회했다.

유동층 보일러의 정상적인 운전을 위해 많은 노력과 고생도 했지만 그 뒤에 오는 즐거움 또한 달콤했다. 그중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이 특허출원을 했을 때로 기억한다.

유동층보일러 특성상 Air Manifold 막힘 현상이 자주 발생해 운전 중에도 막힘 해소가 가능한 방법을 찾아 팀원들과 함께 연구하던 중 ‘유동층연소로의 유동매체 배출장치’를 개발해 이를 발전설비에 설치하고 2000년 8월 특허를 출원했다.

“특허출원을 하고 2년 5개월이 지난 2003년 1월 기술보호를 받을 수 있는 특허등록이 완료됐을 때는 나도 발명가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요.”

또 본사 과제인 ‘환경변화에 따른 기술규정 개정’ 및 ‘크링커 생성억제를 위한 연소관리 운영’ 과제를 그가 직접 수행해 발전설비의 안정적 운영에 기여했다. 아울러 동해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결손가정과의 자매결연을 통한 월1회 방문과 악기연주 등으로 봉사활동을 했던 일도 그의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는 발전용 국내탄 배정량의 축소에 따른 이용률 저하와 전력거래시장 규칙개정에 따른 수익 감소를 극복코자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베트남산 무연탄의 성상분석을 시행해 연소 가능성을 확인함은 물론, 혼소 시험에도 참여해 동해화력의 이용률을 향상시킨 결과 연간 108억원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진 시절이었다. 5남매의 장남인 그는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집이라고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 사글세 단칸방에서 밤에는 호롱불 아래 공부를 해야 했다.

당시 어려운 생활 중에서도 남다른 어머니의 학구열에 힘입어 서울로 전학하게 됐고 자취를 해가며 거의 독학으로 학업을 해나갔다. 청소년 시절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다만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했다. 다행히 대학에 가게 됐고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가족은 아내와 아들 1명으로 단촐하다. “결혼을 32살의 늦은 나이에 해서인지 몰라도 요즘은 딸 하나만 더 있었으면 하는 후회가 들 때도 있다. 그동안 별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가족생활을 해왔고 결혼한 이후 한 번도 떨어져 생활한 적이 없었는데, 올해 3월부터는 가족은 동해에 있고 나는 서울에 생활하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것도 활력이 되는 것 같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하면 된다’라는 것을 가훈으로 ‘忍之爲德’ 즉, ‘참고 노력하면 덕이 된다’는 것을 실천 항목으로 삼아 아들에게 강조하며, 아버지로서 스스로도 이 두 가지를 지켜 본보기가 되는 것이 산교육이라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서로와의 관계’라 ‘사람’이 소중

‘立志主一’의 좌우명과 ‘忍之爲德’의 생활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 주어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그의 평소 인생관이다. 이와 더불어 필요하다고 느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도전해 성취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마인드와 가능한 한 긍정적인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또한 요즘 그는 인간의 삶은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생각에 지인들과 어울려 사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 특별히 하고 있는 운동은 없지만 많이 걷는 편이다. 가끔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을 물려 받았다는 생각도 한다는 그는 채식을 좋아하고, 소식하는 편으로 끼니는 거르지 않는 등 기본적인 식생활의 원칙을 소중히 지키고 있다.

그는 요즘 2가지에 푹 빠져 있다. 색소폰 연주와 우리나라 토종 춘란 배양이 그 것이다. 그 중 색소폰 연주는 요즘 그에게 큰 의미가 되고 있다.

“연주라는 같은 관심사를 통해 만난 사람들인 만큼 지위 고하를 떠나 상호간의 친밀감과 신뢰감이 자연스레 형성되고, 관심 있는 가족들은 동아리 회원으로 받아들여 직원과 가족이 함께하는 연주회를 가져 아이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가족 간의 융화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 하 차장은 동해·삼척지역에‘브론즈 사운드’라는 색소폰 동호회를 창단해 회장을 맡아 인근 해수욕장 및 유원지 등에서 시민을 위한 길거리 공연과 불우이웃을 위한 위문공연 등을 병행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를 남긴다. “입사 시기에 가졌던 열정을 항상 가슴에 새기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타성에 젖다 보면 신념과 열정은 사라지고 그냥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낼 수 있죠. 만약 그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면 시작할 때의 열정을 다시 한 번 새겨보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을 시작하기에 늦었다 생각한다면, 그 것은 늦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때가 시작할 때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