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 건설로 영월에서 양양까지 불을 밝혔다
발전소 건설로 영월에서 양양까지 불을 밝혔다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8.06.11 0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과 인] 중부발전 사업개발처 인니 EKN T/F팀 최충열 팀장

사람에게 있어 고향이란 어머니의 탯줄이다. 나고 자라면서 고향의 흙 밟고 그 땅 열매 나물 먹으며 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생명 태어나던 날은 어머니의 바다도 그렇게 붉게 물들었을 텐데, 유혈이 낭자하도록 피눈물을 울고서야 저녁 불을 마치고 열반에 든 하루 해. 두 발로 붉어진 땅을 붙들고 사는 우리는 별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바람 불다 그친 날 삼성동 큰길 옆을 지난다. 높은 빌딩가에 심어놓은 나무들과 꽃들이 초여름 바람에 흔들거린다. 그 옆으로 하루 종일 나무 쪼아 글을 새기다가 새가 된 듯, 하늘 보고 물 한 모금 마시는 사람이 보인다.

길가에 깔아 논 서각들에 태양빛이 반사되는 오후, 인천서 왔다는 書刻家 조 선생이 깎아 낸 오동나무의 한 귀퉁이가 초여름 길가에 풀썩 주저앉는다.

명인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탐방을 해 가고 있는데 이번처럼 이렇게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전철로 한 정거장이니 그야말로 지척인데 그래서 그런지 가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한전에서 발전사들이 분리된 이후 각 발전사들은 몇 개의 부서를 제외하고는 삼성동 주변 건물에 흩어져 상주하고 있다. 찾아간 곳은 한전타운 길 건너편에 있는 아주 잘 지어진 빌딩 4층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고 말끔하게 단장된 건물처럼 실내가 잘 정돈된 한국중부발전 사업개발처 사무실에 들어서자 저 만치서 다가와 반갑게 손을 내미는 사람, 인도네시아 EKN T/F팀을 맡고 있는 최충열 팀장이다.

인니 EKN T/F팀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EKN(PT. Esa Kertas Nusantara)이라는 제지공장의 자가 유연탄화력발전소 건설·운영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업무를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약 1,200여억원의 건설비가 소요되며 삼성엔지니어링이 EPC업체로 책임을 맡고 있고 중부발전은 사업주를 대신해 건설사업 관리와 준공 후 5년 동안 운영할 예정이다.

가져다 준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부서의 업무에 관한 얘기를 잠시 나눈 끝에 먼저 개인사가 궁금해진다. 먼저 고향을 물었다. 고향이란 지역적 관습의 탐색이 아니라 한 사람을 키워낸 둥지이자 품속과 같아서 중요하고 흥미로운 대화의 소재이다.

“제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영월인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강댐 백지화 운동을 계기로 전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동강 주변 시골 마을이죠. 그렇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평창군으로 이사해 청소년기를 보냈으니까 고향이라 하면 내 마음의 샘물이 되고 있는 평창이라고 봐야죠.”

최충열 팀장이 유년시절 자라던 마을은 가끔 마을 앞 동강에 뗏목이 흘러갔고 또 홍수가 지면 마을 어른들이 강에 나가 족대로 그리 힘 안들이고 뱀장어, 메기, 꺽지 등 물고기를 떠 올리는 것을 자주 보던 그런 풍경을 가진 곳이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동강은 이젠 더 이상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의 자연, 혹은 환경을 말하는 보통명사나 다름없이 되었다. 예전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원시의 비경을 간직하고 온갖 생명들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강이었지만 90년대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조금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많이 찾는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크다는 것. 정부가 그곳에 댐을 건설하기로 하자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환경운동가들은 동강을 지키기 위해 댐 건설을 반대하고 나섰고 몇 년의 투쟁 끝에 동강의 댐 건설은 백지화됐다. 동강의 비경이 살아남고, 그곳에 서식하고 있는 생명들이 삶의 터전을 지키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최 팀장이 소년시절 이후 살았던 고향은 42번 국도에 연해 있는 미탄면 백운이다. 그 때만 해도 집에서 5킬로 정도 떨어진 면소재지에 큰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그가 살던 마을에도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거의 130여 가구에 칠팔백 여명은 되는 주민이 6킬로미터 가량 도로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모두가 농사를 통해 가계를 꾸려가는 동네였다. 마을 한편으로 길게 연한 신작로에 자동차가 나타나면 그 자동차가 마을을 다 통과할 때 까지 누런 먼지가 꼬리를 물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모습이 그에게는 아련한 하나의 추억이다.

그리고 동네 소년들이 그런 자동차 뒤를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숨이 찰 때까지 뒤따라 뛰어가던 기억들도 최충열 팀장에게는 지금 더욱 새로운 그림으로 다가온다.

장군을 꿈꾸었던 소중한 학창시절
“학창시절 꿈은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말씀에서 비롯됐어요. 중학교 때쯤부터인 것으로 기억하나 그 때부터 아버지가 ‘너는 공부 열심히 해 군 장성이 되거나 법관이 돼라’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그 말은 막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의 장래 희망이 됐습니다.”

그래서 최 팀장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 진학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우선 공부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 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꿈을 이루기 위한 1차적 관문인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자신만만하게 응시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 후 공군이 육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이 약했는데 공군을 지원할 걸 하고 한 동안 후회한 적도 있어요.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이런 일에 딱 어울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후 그는 대학진학을 하느냐 마냐를 놓고 고민했지만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5남매 맏이인 그가 그런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오직 농사를 통해 얻는 돈을 혼자서 쓴다면 동생들의 교육기회조차 빼앗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생각했던 것이다.

군에 입영하고 제대 후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릴 때 가진 장래 희망이 멀어지긴 했으나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학창시절 못다 했던 대학공부를 다시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최 팀장은 지금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입사 때부터 줄곧 건설관련 전기업무 다뤄
최 팀장은 1977년 한전에 입사해 신입사원 시절 영월 복합 화력발전소 건설 감독업무를 시작으로 1979년부터 1986년까지는 삼랑진양수건설사무소에서, 또 그 해 6월까지는 울릉도내연발전소 증설을 위해 울릉도지점에 파견되어 공사감독업무를 수행했다.

이어 1986년부터는 강릉 수력건설사무소에서 역시 전기분야에서 시공감독업무를 수행했고 1988년 그 곳에서 과장으로 승격됐다.

1991년 강릉수력 준공을 마치고는 일산 복합화력 건설추진반으로 발령을 받아 1994년 2월까지 일산 복합 화력건설사무소에서 1단계 상업운전 개시 시점까지 근무하면서 역시 전기공사 감독업무를 수행했다.

그 후 양양양수건설추진반에서 그 발전소를 준공한 해인 2006년까지 공무과장과 전기팀장으로 근무했고, 같은 발전소에서 2008년 1월 상순까지 계전팀장으로 전기 제어분야 정비유지 관리업무를 담당해왔다. 그리고 지난 1월 중순부터는 사업개발처에서 인니 EKN TF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최 팀장이 쭉 한 분야에서 근무해 오면서 건설현장은 업무 특성상 근무환경 상 타 사업장에 비해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반대로 준공이 되었을 때는 상대적으로 남다른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건설 초기부터 준비반에 참여해 사업소 개소에서부터 발전소라는 이름으로 사업장 명칭이 바뀌어 질 때까지 전 과정을 겪은 사업장에서는 그 일을 그 혼자서 한 것은 아닐지라도 마치 회사 하나를 설립한 기분이 들곤 했을 것이다.

“누구나 직장생활에서는 업무 수행과정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해 회사에 실질적으로 계수화 할 수 있는 경영상 이익을 가져왔을 때와 그에 수반돼 표창을 받았을 때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해냈을 때 큰 보람을 느끼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번은 1호기 시운전 중 가스터빈 배기닥트가 폭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원인에 대해 웨스팅하우스사에서 파견된 담당 슈퍼바이저도 밝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 팀장이 그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고 시공에러 요인을 수정해 다음 유니트에서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점을 그는 특별한 보람으로 기억한다.

또 한 가지는 최충열 팀장이 삼랑진 양수건설에서 근무하던 1986년도 여름 큰 태풍 위니가 남해안 지역을 휩쓸어 많은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 때 삼천포항에서 배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신수도라는 작은 섬을 연결하는 2만2,900볼트 배전선로 철탑도 예외 없이 지푸라기처럼 꺾여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섬 전체가 전력이 끊기는 일이 있었다.

더구나 때 마침 추석을 며칠 남겨 두지 않은 시점이라 전력공급민원이 비등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경남지사에서는 발전차를 섬으로 실어갔으나 단상 배전선로로 구성된 지역에 삼상발전기로 어떻게 여하히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문제를 해결할 발전소 직원들을 찾게 됐다.

이 과정에서 최 팀장이 선발됐고 저압발전기 출력단으로부터 구분된 선로까지 전력케이블을 설치해 전력을 배분함으로써 발전기를 원만히 가동할 수 있었지만 오래된 발전기는 운전 후 이틀 만에 다시 조속기가 고장이 났다. 고장난 파이롯트 밸브는 국내 커민스 엔진 대리점에서도 형식이 맞는 것이 없어 난감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발전기를 세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구형 커민스 엔진을 많이 사용하는 곳을 찾아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결국 부산 영도항 주변 고물상을 직접 뒤져 보기로 마음먹고 온 종일 찾은 결과 한 고물상에서 정말 극적으로 동일 형식의 중고 조속기를 찾아내 거기서 파이롯트 밸브를 분해하고 발전기가 선 지 이틀 만에 고장 수리를 완료함으로서 그는 섬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최근의 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최 팀장에게 특별히 가장 보람된 일은 2007년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된 일이다. 명장이 한 번 되어 보아야겠다는 특별한 동기를 얻거나 마음을 먹어 본 일은 없다는 그는 품질명장제도가 있는지도 사실 2004년 우리 회사에서 명장제도를 도입하고 이 내용이 공지됨으로써 알게 됐다고 한다.

“명장이란 것은 자신이 품질경영개선을 위해 한 노력들이 국가가 제도적으로 규정한 평가도구를 통해 인정됐다는 데 의미가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호칭이고, 다시 한 번 회사생활의 보람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건설현장은 그 업무의 특성상 여러 가지 좋고 나쁜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근속기간 대부분을 건설현장에서 지냈던 그 역시 오랫동안 기억되는 일들도 많고 또 그런 일들의 떠오르면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많이 생각난다.

기억에 남는 근무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최 팀장은 건설 초기 추진반에서부터 전체 건설사업을 종료하기까지 근무했던 삼랑진 양수와 양양양수 그리고 또 하나, 처음 경험한 해외생활 즉 일본 연수기간을 꼽는다.

“삼랑진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특히 생각나는 것은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해 여름 사택 변압기가 벼락으로 한대 소손되고 전기가 끊기자 보일러실이 침수됐어요. 이를 복구하기 위해 전력량계 결선을 변경하던 중 단락에 의한 섬락으로 전기화상을 입고 부산에 있는 침례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으면서도 감전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건설초기 공사용 전력 공급을 위한 2만2,900볼트 3상 배전선로 공사감독을 할 때 그는 진영변전소에서부터 삼랑진 현장까지 긍장 40여 킬로미터가 넘는 직선 선로 경과지의 산과 들, 과수원, 논밭과 30여개 마을 수백 세대를 방문하면서 한 여름 작업복이 매일 땀에 찌들면서도 사명감에 불타 지주들로부터 토지 사용 승낙을 받아냈다.

또한 헬리콥터를 이용해 전주 중량물을 설치장소로 운반하는 방법을 동원해 토지보상으로 지연된 공정을 만회하고 필요한 시기에 전력을 공급한 일을 기억한다.

최 팀장이 강릉 수력건설 현장에서 근무할 때인 1988년에는 6개월간 일본 연수를 다녀올 기회를 가졌는데 그 기간 동안 정말 일본어 실력을 한층 향상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말을 이용해 주요 명소를 들러 볼 수 있어서 또 다른 문화를 접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학교를 제외하고는 이미 주 5일 근무가 정착돼 있던 때라 주말을 이용해 일본 각지의 문화를 체험하는데 더욱 도움이 됐다. 그러나 연수 체재비는 그리 여유 있는 것이 아니어서 2, 3주에 한 번 정도 명승지를 돌아 봤던 기억이 그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일본 연수를 통한 일본어 실력향상은 귀국 후 강릉수력건설은 물론 부분적으로 일본 업체와 일을 수행해야 했던 일산복합, 양양양수에서 관련 업무를 원만히 수행하는데 있어 충분한 양분이 됐지요.”

또 하나는 약 14년 동안 강릉에서 양양 사무실간 편도 65킬로미터를 출퇴근하면서 동해안의 짙푸른 파도와 동해 일출을 만끽하며 생활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인간 심신의 피로를 씻는데 정말 자연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온 몸으로 느껴 봤던 기간이었다.

최선과 겸손, 긍정의 자세로 가족사랑 실천
최충열 팀장의 아버지는 2년 전 작고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도 평생 한학을 하셨고 형제들이 자립하게 된 이후로는 시조와 한시를 수시로 읊고 60대 후반에도 수개월동안 매주 서울 성균관대학교 유림과정을 이수하실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오직 가정에만 충실한 현모양처이십니다. 그리고 굳이 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는 점과 가정의 화목도 형제간의 우애도 적절한 관심과 이해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을 잊지 말고 항상 지금처럼 화목한 가족 만들기에 노력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한 지붕에서 살고 있는 가족은 최 팀장의 아내와 자녀 총 네 식구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큰 방에 걸어두었던 가훈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즉 유학에서 이르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곧, 어질고, 의로우며, 예의 바르고, 지혜로우며 믿음직함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독립해 자녀를 기르면서 그와 같은 아버님의 가훈을 집에 걸어두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아이들 교육의 모토는 ‘공부를 하든 어떤 것을 하던 진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겸손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그는 항상 강조하고 있다.

이제 둘 다 성인이 된 나이고 학생으로서의 교육은 끝났지만 학습은 평생의 일부라는 점을 얘기해 주고 또 최 팀장은 그것을 몸소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 팀장이 자녀들에게 고마운 점은 건설현장을 다니다 보니 이사를 자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관계로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하는데 네 번씩이나 전학을 시켜야했던 적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잘 적응하고 문제없이 친구들을 사귀고 착실히 성장해 지금도 그 때 환경을 생각하면 아버지로서 마음이 아프지만 그런 환경을 극복한 아이들이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오히려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 봅니다.”

평소 최 팀장은 책을 통해서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배우고, 인간 세상에 일원이 된 이상 사회에 누를 끼치지 말고 가자는 것이 평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스스로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과 지은 ‘송죽(松竹)’이라는 호가 의미하는 대로 바르고 곧게 살겠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시간이 나면 가끔 색소폰을 연주를 하기도 하는 최충열 팀장은 “연주한다고 하기 보다는 연습한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그 전에는 한가할 때 가끔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곤 했지만 색소폰에 취미를 붙인 다음부터는 다른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지요.”

예전부터 그는 아코디온을 꼭 배우고 싶어 했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이 습득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조언을 듣고 그 대신 색소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최 팀장은 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특별한 음식을 가려먹거나 약을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가능한 한 매일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주말에는 꼭 걷기를 한 시간 정도 하며 또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맨손체조를 하는 습관을 들였다.

또 되도록이면 잠자는 시간을 일정하게 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저녁 10시경에는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에는 항상 기상한다. 그의 이런 생활은 군에서 제대한 후 줄곧 지켜 온 방식이다.

그리고 정신 건강이 건강관리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늘 모든 사물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보려 노력하고 있다.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면 우선 자신의 마음 자체가 편해지므로 결국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후배들에게는 편하고 쉬운 일에 익숙해 지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와 학습하는 습관을 견지하라고 주문하며 평생학습을 하기를 권한다.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희열이라고 말하는 최충열 팀장의 진지함에서 후배들을 향한 훈훈한 사랑이 느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