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등불, 내가 지킨다
당진의 등불, 내가 지킨다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8.03.1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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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인] 서광전기 이주환 이사

때때로 平地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산 같은 사람은 멀리 볼 수는 있겠지만 너무 높아서 늘 혼자이고 강물 같은 사람은 많은 걸 볼 수 있겠지만 길을 벗어날 수 없으니… 서서, 오가는 바람 맞으며 세상 볼 수 있는 저 넓은 평야의 나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봄맞이 춘삼월에 주인공을 만나러 당진가는 길,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따라 평택을 넘어서자 광활하다는 표현은 좀 과장됐다 하더라도 넓은 평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전화통화에서 느껴지던 충청도 사람의 구수한 억양이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안성을 넘고 충남 당진 땅에서 만난 서광전기(사장 김광원) 이주환 이사(현장대리인)의 고향은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였다. 원래 우리나라는 동고서저의 형상으로 특히 남한 쪽에서는 수원쯤에서부터 목포에 이르는 대평야가 우리 곡식의 근원이다. 

그런 대평야의 한 가운데 당진이 있고 우강면의 면소재지는 창리이다. 우강면에는 삽교천과 곡교천이 아산만에 흘러드는 삽교호 하구에 있으며, 송산리 일대에는 저평한 구릉성 산지가 있을 뿐 대체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이다.

송산리는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태어난 곳으로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및 기념비, 성모상 등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그곳이 바로 솔뫼성지다.

솔뫼는 김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이곳에서 1821년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했고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으로 이사할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부터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라 한다.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일컬어지는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일어나 충청도 전지역과 나아가 지금의 전북지역,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돼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가족들의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지금은 우물과 집터, 대나무들만이 주위에 있는 것은 역사적 사료가 소실된 것이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이렇게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땅과 삽교천이 주위에 있는 곳에서 태어난 이주환 이사의 집안은 현재는 3선의 군 의원을 지내고 있는 부친은 원래 비교적 많은 농지에 농사를 짓던 자작농이었고 어린 시절 성장하며 특별히 고생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업고등학교와 대학교(전기과)를 안양에서 나온 그는 천안에 있는 전기업체에서 1년 6개월을 근무하며 학교에서 배운 교과과정과 실습을 바탕삼아 전기업무를 익히며 전력분야에서의 첫발을 딛게 됐다.

그 후 15년째 당진에서 한전의 단가계약업체인 서광전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 이사는 회사의 관리업무를 비롯해 현장대리인까지 굳은 일 어려운 일 마다않는 회사의 팔방미인이다.

바로 어제 이 이사와의 전화통화 한마디를 목적지 삼아 당진에 도착해 몇 번이나 전화로 지역을 물어가며 찾아갔을 때는 오후 4시가 넘어서는 시간, 들판엔 햇빛이 쏟아져 화창했고 그 햇살 아래 마침 농로를 따라 가설돼 있는 전주의 정비가 한창이었다.

두 대의 작업 차량이 서로 마주보고 서서 농로 옆으로 이어가며 놓여있는 전주들을 점검하는 과정인 것 같았다. 한 차에 두 명씩 이동고가사다리 위에 달린 박스형의 공간에서 리모컨으로 방향을 조정하며 일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바쁜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의 시간을 뺏는 일은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조용히 일하는 현장에 다가가 이주환 이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사라는 직함이 현장에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 했지만 사무실의 관리업무는 물론, 현업을 관장하며 현장을 관리 감독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라는 현장의 성격과는 달리 화사하고 밝아 보이는 이 이사가 잠시 일손을 놓고 악수를 나눴다. 젊은 시절 일찍부터 전기 분야에서 일하며 일에 잔뼈가 굵은 그이지만 순수한 용모가 시선을 끌었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이주환 이사는 본인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비교적 여유가 있게 성장한 덕분에 집안에서 유학을 보내 일찌감치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와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최근, 일찍 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지금은 어릴 적의 친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조금씩 서운한 감이 들지만 현업에 몰두하며 현장과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는 일로 새로운 대인관계를 즐긴다.

대학에서도 전기과를 전공한 그는 전기를 전공한데 대해 당시의 전기과는 졸업을 하면 바로 직장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어서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전공의 선택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가공배전 전공의 일이 3D업종이라는 얘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실제로 그가 일하는 현장이나 다른 공사현장 어디에도 젊은이를 보기가 쉽지 않다. 새로 충원되는 인력이 적기 때문에 신기술의 노하우를 현장에 즉시 적용하기가 쉽지 않고 인력 동원에 어려움이 크다. 이런 점이 이 이사에게는 또 다른 힘든 일 중 하나다.

살아있는 고압선을 다루기 때문에 생명과 직결돼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그래서 직원들과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신입직원들과 기존의 직원들에게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한다. 전에는 한전에서 일괄적으로 시행했는데 최근에는 민간에서 위탁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안전필수, 모든 전선·전주 항시 챙겨요

당진군은 평지와 논밭이 많지만 최근 도심에서는 전주를 세우기 어려운 지역을 위주로 지중으로 송전선로를 매설해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고 선로를 끌어다 쓸 수 있게 되면서 전주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도 골목을 돌아보면 거미줄처럼 전깃줄이 얽혀있다.

송전선로에서 변전소를 거쳐 일반 전기가입자에게 오기 위해서는 배전 가공선로를 거치게 되는데 보편적으로 전신주를 세우고 변전소에서 넘어온 배전선로를 연결해 각 가정이나 공장, 건물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 건설해 주는 것을 배전가공 및 지중 선로공사라 말한다.

이러한 배전전기공사 외에도 늘 사고 없이 안정적인 전원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정비·점검이 따라야 하는데 일정한 시일의 간격을 두고 각 지역을 돌며 순찰하고 점검하는 것도 회사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이주환 이사는 자신의 관할구역인 당진의 논밭과 골목마다 모든 전주를 샅샅이 알고 있을 정도로 그 지역의 배전 가공선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안전입니다. 만일 안전상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기사고는 신체상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죽거나 다치는 건 물론이고 회사의 운영에도 막대한 손실을 끼치게 되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안전과 관리업무를 담당해 온 그는 업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이 뭐냐는 질문에 당연히 ‘안전’이라며 몇 번을 강조했다.

송전선로 건설시 한전직원들과의 협조도 잘 이뤄지는 편이고 업무에 문제는 없지만 때로 “우리 동네에는 전선이 지나갈 수 없다. 우리 집 옆에는 전주 안 된다.”며 자기 편의주의 이기적인 민원이 접수돼 업무의 진행이 안 될 때가 그에게는 가장 힘든 상황이다.

일반 주민들은 그 현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때로 마찰을 빗기도 하는데 주민들과 한전 사이에서 원만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시공업체의 입장인 이주환 이사는 이제 그런 일에도 해결하는데 이력이 붙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정전으로 주민들이 곤란을 겪을 때, 야간작업으로 힘들긴 하지만 무사히 전기가 복구돼 안정적인 전원이 동네에 공급되면 그게 가장 큰 보람이다. 특히 홍성과 예산 스파케슬 간의 전선 및 전주포설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공했을 때가 그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국도가 많은 지역적 특성으로 차량의 충돌로 인한 단락사고도 많아 그러한 것에도 늘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이 이사는 여름철에는 홍수에 의한 피해를, 겨울에는 월동시설에 단전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이 가장 어려운 난제다.

2002년도에는 당시 시내가 비와 낙뢰로 인해 물에 잠기고 단전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열흘이 넘도록 복구 작업에 매달려 작업과 비상대기 등으로 꼬박 날을 지새우기도 했다.

또한 태풍이라도 불게 되면 정전사고가 많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전원 비상으로 팀별로 24시간 대기상태에 돌입해 대기해야만 한다. 이 일을 하며 이제 이 이사에게 이러한 일들은 일상사로 늘 그에 대비한 관리지침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이일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지역에 전기가 끊기지 않아 주민들이 편안히 생활하고 때로 주민들이 노고가 많다며 격려해 줄때이다. 또한 회사도 안정된 사업의 성과를 거둠으로 인해 직원으로서 꾸준한 소득을 얻고 가정생활도 원만하게 꾸려 갈 수 있는 것에 이주환 이사는 늘 감사하고 있다.  

그가 고등학교와 대학생활을 자취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타고난 근면성과 건강이다. 요즘의 건강 비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일찍 출근하고 하루를 준비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늘 힘든 일을 반복해야 하는 그에게는 꾸준한 운동은 벅찬 일이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 등산을 하고 있다.

“말로 ‘아끼고 절약하라, 책 많이 보라’하는 것보다는 어른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실천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가족들은 만일 해롭지 않은 일이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고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교육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일 안하는 젊은이들, 인력수급 힘들어

전기공사의 일은 비교적 거친 일이고 자재의 수급과 현장의 상황에 따라 많은 일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업체와의 거래 관계에서도 자재에 대해 꼼꼼히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엄격해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칠 때면 잘하고 못한 것에 대해 분석하고 개선해야 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다.

“지방에는 한전 교육수료생 자체가 많이 없고 그동안 협회에서 회사에서 1~2명씩 선발해 교육을 하고 현장에 투입했었는데 최근에는 그나마 없어져 가장 절실한 것이 현장인원이죠. 현장의 인력을 어떻게 차질 없이 충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늘 저에겐 과제입니다. 심지어 한전의 직원들도 지방에 와서 현장을 알만하면 발령을 받고 도시로 가버리는 일이 반복돼 현장의 숙지하는데 많은 시간이 또 들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공고나 공대의 전기공학과 졸업생 중에 실제 현업에서 전공의 일을 하는 경우를 통계로 보면 1~2% 정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설사 전기를 전공했다하더라도 하드웨어적인 일보다는 소프트웨어적인 일을, 오프라인의 일보다는 온라인의 일을 점점 더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주환 이사의 설명이다. 

업무의 성격상 늘 스스로나 직원들의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업무의 노하우를 알려주면 이를 빨리 받아들이고 지시한 사항에 대한 부적절한 시공에 대해 관리적 측면에서 지적하는 것을 올바르게 흡수하고 재교육을 통해 시정하도록 하는 것이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전기공사의 일이라고 강조한다.

“위험한 일이니까 방심은 금물입니다. 저는 전주에 올라가는 전공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은 없었냐고 꼭 한 번씩 물어보곤 합니다. 그 정도로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인사 감전사고 한 번으로 개인도 회사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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