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사람’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꼭 필요한 사람’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 한동직 기자
  • 승인 2008.02.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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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인] 한국남동발전(주) 분당복합화력발전처 권영삼 부장

“우리가 생활하면서 공기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듯이 전기 또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과하고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전기의 중요성은 더 해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단 일 분만이라도 정전이 된 경우를 당해보면 그때서야 전기의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비교적 날씨가 따뜻한 1월의 오후, 38년간을 오직 전기 생산을 위해 발전업무에만 종사해 온 한국남동발전(주) 분당복합화력발전처의 권영삼 부장을 분당에서 만났다.

권 부장은 “온 국민이 전기의 고마움을 더욱 느꼈으면 좋겠고 외국에서 비싼 연료를 구입해 발전하므로 전기사용을 절약해 외화를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경북 영덕군의 조그만 마을 玉琴(옥금)이라는 예쁜 이름의 동네에서 태어난 권 부장에게 고향은 지금 부모님이 안계시니 더욱 가 보기가 힘든 곳이 됐다.

어릴 적엔 매우 정들었던 고향마을이었다. 마을 앞엔 넓은 논과 밭이 펼쳐지고 그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고기를 잡고 물장구 치고 놀던 때가 그에게는 어제의 일처럼 주마등같이 떠오른다.

“산 개골 입구엔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자주 찾아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오엔 동네 처녀들이 긴 댕기머리를 늘어뜨리고 그네를 타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뒷동산엔 소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마을인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고 여느 농촌이나 다름없는 노인 분들만 사는 마을로 변해 있는 고향에 대해 권 부장은 깊은 연민을 느낀다. 

권영삼 부장이 어릴 때 부모님은 도시에 나가 장사를 했다. 그래서 그는 외가에서 자라야만  했다. 엄하신 외할아버지와 인자하신 외할머니 밑에서 천자문을 외우고 소를 먹이다 친구들 보다 두해나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부산으로 전학을 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 그 땐 아버님의 장사도 잘돼 돈 들여 과외공부도 한 적도 있었다. 당시 권 부장의 아버님은 통반장 일을 보셨고, 심부름으로 집집마다 문서를 전달하기도하고 공과금을 걷기도 해 동네 어른들이 그를 꼬마 반장이 왔다고 놀리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귀향하고 권 부장은 형과 남아 자취를 하며 객지생활을 하기 시작하게 됐다. 중학을 졸업하던 해 살던 집마저 도시개발로 헐리게 되자 고향으로 가서 농사일을 돕던 그를 그해 부산에 살던 형이 불러 다시 형과 함께 양복 일을 배우게 됐다.

산꼭대기에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손이 얼어 터지는 등 고단한 생활을 하다 보니 오기가 발동된 권 부장은 이렇게 고생해 봐야 남의 집 일꾼밖에 되지 않겠다 싶어 어린마음에도 배워야 한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

“형님 몰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아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해 비교적 학비가 적은 부산공고에 입학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른 후 합격했다는 소식을 부모님과 형님께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꿈은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만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꾼 채 한전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권영삼 부장이 남동발전주식회사에, 정확히 말해 그 때의 한전에 입사하게 된 동기는 너무 단순한 계기로 이뤄졌다. 1969년 공업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말쯤 한전에서 전국의 공업고등학교와 공업전문대학에 졸업예정자 중 각 학교 2~3명씩 추천을 받아 산학양성생이란 이름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각 발전소에 배치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에도 공고 졸업하고 최우선으로 선호하는 직장이 한전이었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기업환경에서 국영기업이라는 매력에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장이었기 때문에 지원서를 내고 입사하게 된 것이다. 올해 9월 정년퇴임을 앞둔 권 부장에게 한전은 고등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자 이제 마지막 직장이 됐다.

권 부장은 현재, 자연과 어우러지는 수도권 도심 속의 공원 같은 발전소, 난방열 공급과 지속적인 나눔봉사활동, 청정 지하암반수 공급 등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분당복합화력발전처(처장 김성섭)에서 근무하고 있다. 

분당복합화력은 가스터빈 발전기와 증기터빈 발전기를 조합한 복합화력 발전방식으로 전력과 난방열을 동시에 생산 공급하는 설비로, 생산된 전기는 수도권에 공급하고 있다. 또한 기동소요시간이 짧아 하절기 안정적 전력계통 운영에 크게 기여하며, 지역난방 급수가열기에서 생산된 난방열은 분당, 수서 및 강남일대 16만5천 세대에 저렴하게 보급, 지역주민 복지향상에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복합발전소다.

발전처 등 전력 핵심에서 닦아온 명장의 길

69년 8월 산학양성생으로 한전에 입사하게 된 권영삼 부장은 부산화력발전소(현재는 남부발전 부산복합화력본부)에서 1년 반 동안 교육을 받고 71년 1월에 채용, 배치돼 업무를 수행해 왔다. 

71년부터 92년까지 약 20여 년간 영남화력발전처와 울산화력발전처에서 발전운전업무 수행 대부분을 교대근무를 하면서 발전기, 터빈, 보일러, 보조기기 등을 구석구석 점검하며 설비의 이상 유무를 파악하고 발전기의 기동, 정지를 반복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본사에 근무하면서 92년부터 약 3년 2개월간 권 부장이 섬지방의 전화사업을 추진할 당시, 작은 도서에서는 경운기 모터나 정미소 발동기와 같은 소형 모터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했는데 저녁시간대에 조금씩 돌렸다가 저녁 11시 이전에 정지해야 했고, 주파수도 일정하지 않아 전등불이 깜빡거리고 냉장고, 선풍기 등은 사용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열악했다.

이런 환경을 수용전력량을 충분히 고려한 상용 디젤발전기를 설치하고 24시간 가동해 TV는 물론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 까지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주민들의 숙원을 해결했는데 권영삼 부장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동력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건설처 탈황설비부에서 95년부터 약 2년간에 걸쳐 우리나라 최초로 50만 kW 용량의 신규발전소(하동, 보령, 태안, 당진화력)에 공해방지용 탈황설비 설치를 위해 설계, 입찰규격서 작성, 입찰서 평가 등 구매추진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탈황설비 구매 계약까지 완료 후 부서의 해체로 분당복합화력발전처로 전근 와 97년부터 7년 6개월간 발전운전 근무를 하기도 했다. 분당복합은 청정연료인 LNG를 사용하므로 공해를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가동 중에 있으며 전기뿐 만아니라 난방열도 생산해 분당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공급하고 있다.

2001년 한전에서 분사해 한국남동발전(주)로 전적한 때부터 2004년 9월까지 분당복합화력 품질안전업무를 담당해 왔고, 금년 1월부터는 그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 사업소 선임 안전관리자로서 발전부로 이동해 발전운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동안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근무지는 20여년이나 근무했던 영남화력입니다. 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달성을 목표로 전 국민이 불철주야 새마을 운동과 함께 열심히 일할 때 저도 온 밤을 지새우고 전기 생산을 위해 발전소 구석구석을 점검하며 긴급사항에 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영남화력은 시설용량 20만kW 2대로 지금의 원자력 발전소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소였다. 당시 부산화력 1,2호기 석탄발전소가 한호기당 6만6천kW였다. 큰 화력발전소는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터빈의 냉각수를 얻기 위한 것이다. 냉각수로 사용하는 해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를 취수로라고 한다.

“어느 해인가는 여름 태풍이 지나가고 폭우가 쏟아져서 태화강 상류에서 오일드럼통 수십 개가 떠 내려와 취수구의 스크린에 걸리며 수위차로 발전정지가 될 뻔 했던 것을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근무자들이 합심해 건져 올려 발전정지를 방지한 것 등이 생각납니다.”

어떤 때는 갈치 떼가 몰려들어 취수구의 스크린(그물)을 막아 정지가 될 뻔 했고, 해파리들이 떼로 몰려와서 스크린을 막기도 했다. 그것들을 치우고 퇴근하면서 동료들끼리 한잔을 하고 헤어지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권 부장이다.

남동발전 제 1호 ‘명장’된 건, 가족과 모든 직원의 힘

전기생산은 한시라도 중단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교대로 근무를 하게 된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휴일이나 명절에도 밤 낮 구분 없이 근무하고 있는 발전원들이 있다.

도서전화사업시 섬에 발전소 건설을 위한 수요조사를 하고, 발전소부지 및 송유관로 선정, 기자재 운반, 건설현장 감독 등을 위해 여러 번 섬 지역을 드나들어야 했던 것이 돌아보면 권 부장에게는 어려웠던 때였다.

특히 옹진군 관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를 담당할 때 당시에는 쾌속 여객선이 운항하지 않아 여객선을 무려 11시간 타고 가야 했다. 처음에는 배멀미를 참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근무하던 중 한 가지 에피소드라면 권 부장이 도서전화사업을 할 때였다. 옹진군에 있는 자월도(紫月島)란 작은 섬에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섬에 감독하러 들어갔다가 폭풍이 불어와 꼼짝 없이 섬에 갇히게 된 적이 있었다. 생일이 추석 열흘 전인데, 추석 명절을 전후해 한 달 가량을 섬에 머물러야 했다.

육지에서 섬으로 오갈 때에 파고가 2m 이상만 돼도 배가 출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일기예보를 보고 배를 타러 항구에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일도 허다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파고가 높아져 배가 출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섬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알게 됐다.

권 부장은 금년 9월말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벌써 정년퇴임을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게 그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 맡아보던 품질안전담당업무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발전부에서 발전운전 업무를 보면서 이제껏 해오던 업무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권 부장이 맡았던 업무는 품질안전업무로서 발전소의 제반 품질경영업무를 계획 추진 실천하고, 품질경영시스템(ISO 9001)을 구축했으며, 설비개선, 품질교육, 분임조 활동, 절차서 제·개정 등을 통해 설비, 운전, 정비품질 등을 향상시켜 양질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또한 안전업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분야로서 현재 ‘사업소의 안전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안전보건경영시스템(KOSHA 18001)구축, PSM인증, 설비안전점검 등 안전관리 활동을 수행해 왔다.

그 결과 지난해 9월 분당복합화력이 무재해 13배를 달성해 한국산업안전공단으로부터 인증패를 받았고 앞으로 무재해 15배, 20배 또는 그 이상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전 직원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말, 회사가 국가품질경영상을 수상했고 권영삼 부장 개인적으로는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되고, 남동발전(주) 제1호 Q-마에스터로 인정을 받은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사장님 이하 우리 회사 모든 직원들의 협조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분당복합화력발전처의 처장님과 동료 직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 자신의 명예보다도 남동발전의 품질경영활동에 더욱 이바지해야겠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도서전화 사업을 하면서 전국 50戶 이상 도서지역 주민들의 숙원이던 전기를 24시간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발전소를 건설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던 일이 권 부장으로서는 큰 보람이었다.

또한 탈황설비부에 근무하면서 당시 신규화력이었던 하동, 보령, 태안, 당진화력에 탈황설비 설치를 위한 설계, 입찰규격서 작성, 입찰서 평가 등 구매추진업무를 밤새워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헐뜯고 아옹다옹 다툴 필요 없이 그저 올바르게 자신의 本分에 충실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즐겁게 해야 할 것입니다.”

권 부장은 요즘 분발마라고하는 마라톤 동우회에 가입해 매주 수요일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휴일이면 아내와 함께 사이클을 타고 한강변을 달리기도 한다. 욕심을 내지 않고 그저 건강을 위해 취미삼아 달린다.

전기사랑마라톤, 중소기업사랑마라톤, 국제평화마라톤 등에 참가해 10킬로미터, 하프코스에 완주한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아들과 함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권영삼 부장의 취미는 바둑, 등산, 독서 등이다. 바둑은 생각을 많이 하고 머리를 써야하므로 치매를 예방할 수 있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바둑격언에 소탐대실이 있듯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이기는 길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등산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에 심취하는 맛이 있으며 건강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전국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습니다.”

권 부장의 부모님은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사기를 당하시고 가산이 탕진되자 귀향해 아버지는 마을 里長을 맡아보면서 농사일을 했다. 큰집 전답을 함께 맡아 새벽 일찍 일어나서 논밭 일을 돌보며 온 동네에 소문이 나도록 부지런했다.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고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살아생전 더 효도를 해드리지 못해 한이 됩니다. 형제들과는 우애롭게 지냈고 모두 출가해 가정을 꾸미고 잘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족은 아내와 남매를 두고 있는데 둘 다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잘 자라준 게 권 부장은 무엇보다 고맙다. 이젠 둘 다 성년이 됐고 학업도 마치고 어려운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직장을 얻어 걱정을 시키지 않는 것이 대견할 뿐이다.

“특별한 가훈이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합니다. 최선을 다해 나간다면 어떠한 역경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권 부장은 후배 직원들에게 도전과 창의적인 노력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해감으로서 남동발전이 영원히 존속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재목으로 커 주기를 당부한다. 남동발전의 경영방침 가운데 하나인 ‘Going-Concern’은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남동발전의 사보인 한남전 창간호에 ‘남동이여 영원하라!’라는 시를 게재한 적이 있다. 그것도 신입과 선배들이 함께 회사가 영원히 존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던 것이다.

후배들이 있어 더욱 보람을 느낀다고 그는 말한다. 오늘은 신이 만들고, 어제와 내일은 자신이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내일을 행복하고 보람되게 만들려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인생은 B(Birth)에서 D(Death)로 끝난다고도 합니다. 그사이에 C가 있는데 C는 Choice 즉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어떤 방향으로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잘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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