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에게 혼전 출산사실을 고지해야 하는가
배우자에게 혼전 출산사실을 고지해야 하는가
  • EPJ
  • 승인 2016.05.0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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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남녀 간 애정을 바탕으로 평생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결합이다. 민법 제816조 제3호는 부부 일방이 사기나 강박으로 인해 혼인의 의사표시를 한 때에는 혼인의 취소를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기망에 의한 혼인의 해소와 책임추궁을 함으로써 혼인의 의사결정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한 혼인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기를 이유로 혼인을 취소하려면 혼인의 본질적 내용에 관한 기망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의 재산관계나 경제적 능력, 집안내력, 직업 등에 대한 기망은 혼인의 본질적 내용이 아니어서 혼인 후에 거짓이 발견되더라도 혼인 취소 사유가 되기 어렵다.

혼인을 취소하더라도 혼인 전 상태로 되돌아가기 어렵고 취소 효력이 소급되지 않기 때문에 혼인의 효력이 발생해도 혼인 성립 당시의 사유를 들어 뒤늦게 혼인 효력을 상실시켜야만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극히 예외적으로 혼인 취소를 인정한다.

혼인 취소 사유로 ‘사기’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당해 사항이 혼인의 의사결정에 미친 영향 정도, 부부의 신뢰 형성에 필수적인지 여부,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 보호 영역인지 여부, 사회 일반의 인식과 도덕관, 윤리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

남편은 베트남 여자인 부인과 국제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작성한 혼인상황확인서에 ‘혼인신고 안 했음’, ‘독신’이라고 기재돼 있고 맞선을 볼 때도 혼인여부를 묻지 않아 부인이 초혼이고 출산경력이 없는 것으로 알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혼인 후 부인에게 혼인 및 출산경력이 있는지 물었으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 후 재판 과정에서 남편은 부인이 베트남에서 출산한 사실을 알게 됐다.

부인은 13세 무렵 베트남에서 소수민족인 타이족 남성으로부터 납치돼 강간 당하고 임신했으며, 그 남성이 자주 술을 마시고 폭력을 행사해 이를 피하려고 친정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출산했다. 이후 그 아이는 남성이 데리고 갔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원심법원은 혼인 당사자의 혼인경력과 출산경력은 혼인 의사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며, 이를 속이고 결혼한 것은 결혼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으로 혼인을 취소하고 부인에게 위자료까지 부담하도록 했다(전주지방법원 2015.1.19.선고 2014르445, 2014르452).

그런데 대법원은 부인이 성폭력 피해를 당해 임신과 출산을 했으나 곧바로 그 자녀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후 8년 동안 양육을 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출산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혼인취소 사유로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부인의 주장처럼 자녀를 임신하고 출산하게 된 경위 및 혼인의 풍속과 관습이 다른 국제결혼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더 심리해야 한다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대법원 2016.2.18. 선고 2015므654).

위 대법원 판결은 강간으로 인해 임신과 출산을 했다면 이는 부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뤄진 행위이므로 수치심 때문에 밝히는 것을 꺼릴 수도 있어 임신과 출산사실을 알리지 않은 부분을 혼인취소 사유인 사기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보여준 판례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상대방의 독립적인 의사에 따라 결정돼야 하고 만약 부인이 억울한 사유로 임신과 출산을 했더라도 남편은 그 사실을 알고 혼인의사를 결정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상대방의 아픈 상처를 감싸주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부 간의 신뢰가 깨진 상태에서 혼인을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으로 여겨진다. 법원의 판단은 보통 사람의 상식에 근접해야 할 것이다.

최정식 교수는...

서울대 법대 동대학원에서 학사와 석사를,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각각 취득했으며 중앙병무청 행정심판위원, 대한주택보증(주) 법률 고문, 서울지방경찰청 법률 상담관, 고려대학교 의사법학연구소 외래교수,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법무법인 청솔 대표변호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스카우트연맹 법률고문, 서울남부지방검찰청 피해자배상심의위원, 서울남부지방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숭실대학교 법과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증권집단소송법의 이해’ 등의 저서와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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